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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캐릭터를 맡든 자신의 인장을 콱 드러내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캐릭터마다 조금씩 낯선 얼굴로 등장하는 배우가 있다. 이학주는 후자의 배우다. 영화계 블루칩으로 불리던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그가 거쳐온 인물들을 훑다 보면 동일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 드라마 ‘부부의 세계'(2020)로 대중에게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올해 OTT 드라마 ‘마이 네임’과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로 포텐을 터뜨린 이학주. 이제 ‘입덕’했다면, 당신은 감자밭에서 넝쿨째 감자를 캐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단편영화 ‘밥덩이’로 데뷔한 이학주는 초반부터 소위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강동원이 사제복을 입으며 화제를 끌었던 영화 ‘검은 사제들’의 모티프가 되는 단편 ’12번째 보조사제’에서 훗날 강동원이 연기한 보조사제를 맡았기 때문. 이학주는 이 작품으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단편의 얼굴상’을 수상했다.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의 철없는 남동생 역, ’38사기동대’의 세금징수국 청년 일자리 직원, 모바일 무비 ‘통 메모리즈’에서 신출귀몰한 싸움실력을 보여주는 고등학생 등을 거치며 부단하게 활동해왔다. 역할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그는 매번 생활에 착 붙은 목소리와 안정된 연기로 제 몫을 해왔다.
‘부부의 세계’의 박인규로 분한 이학주를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이 잊히지 않는다. 여자친구에게 거침없이 폭력을 저지르고, 여자친구를 보호하는 지선우(김희애)와 팽팽하게 맞서는 짐승같이 거친 날것을 보인 그가 전작 ‘멜로의 체질’의 노승효를 연기했다는 사실이 매칭되지 않았기에.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침없이 직진했다가 또 거침없이 떠나버리는 나쁜 남자지만 독특한 재질의 캐릭터였던 노승효가 인상적이었는데, 그를 연기하는 이학주가 박인규의 얼굴이 또 기가 막히게 어울려 놀라웠다. 영화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의 청년 준근은 어떻고. 취직도 못하고 계절학기도 실패한 한심한 청춘이 서핑 배틀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학주가 보여준 얼굴은 또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청년이었다. 변검처럼 휙휙 얼굴이 바뀌는데, 나를 봐 달라고 아우성치는 게 아니라 순식간에 주변에 스며들어 결정적인 순간 기민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연기가 단단하게 다가왔다.2021년, 이학주의 활동은 눈부셨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마이 네임’에서 동차 보스 최무진(박희순)의 충직한 오른팔인 정태주와 웨이브 오리지널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정은(김성령)의 보좌관 김수진으로 연달아 시청자를 만난 건데, 누군가를 보좌한다는 점은 같지만 두 작품의 장르와 캐릭터의 성향이 달라 묘한 간극을 느끼는 재미가 있다. 특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에서 김수진은 속마음 내레이션이 많으면서, 극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쥔 인물이라 눈에 띈다. 야당 4선 의원 차정원(배해선)과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로, 과거 차정원의 보좌관이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이정은 장관을 보좌하는 캐릭터. 이학주는 김수진을 맡아 미묘한 차이의 표정과 행동으로 순간순간 공기의 흐름을 바꾼다. 차정원과 협상을 하기 위해 들어간 대기실에서 의미심장하게 다리미를 손에 쥐었을 적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시게 되는데, 다음 순간 천연덕스럽게 차정원의 바지를 능숙하게 다리는 장면으로 숨을 내쉬게 만들더라니까? 차정원과의 키스신은 말해 무엇하랴. 차정원을 연기한 배해선이 ‘이학주가 그렇게 섹시한 줄 몰랐는데’라고 인터뷰에서 밝혔을 만큼, 나 역시 주책맞게 그 장면에서 헉 하며 소리를 내질렀다고.
‘마이 네임’과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이학주의 빼어난 비율과 수트핏 등 그의 섹시함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에도 의의가 있다. 이학주는 날카롭게 느껴지는 눈매와 흰 피부 외에 드라마틱하게 돋보이는 외모는 아니다. 그러나 보는 각도에 따라, 세심하게 조율하는 눈빛에 따라 한순간 설렘을 자극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거침없이 누군가에게 린치를 가하는 것도 어울려 보이는 오묘한 얼굴을 지녔다. 그랬기에 지금껏 선역이나 악역, 지질하거나 평범한 역할에도 착 붙는 연기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리라.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에서 여주인공의 전 남자친구로 잠깐 얼굴을 내비쳤을 때, 이학주임을 인지함과 동시에 순식간에 ‘무슨 캐릭터지? 변태? 싸이코? 찌질이? 훈남?’ 이런 생각이 들게 할 만큼, 폭넓은 연기와 얼굴을 보여온 이학주. 최근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공작도시’에서는 진정성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사는 보도국 기자 한동민으로 출연 중인데, 과연 인물 소개란의 설명 그대로 갈지 어떤 반전을 줄지 기대를 준다. 이미 이학주의 매력에 치여서 ‘공작도시’의 분량에 만족할 수 없는 단계라면, OTT를 뒤져보라. 15분짜리 단편영화와 독립영화, 드라마 스페셜 등 여러 작품에서 이학주의 어마어마한 ‘갭차이’를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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